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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9 요한일서 2:7-8
  2. 2009.09.28 요일 1:8-10 (죄를 느껴 괴로울 때) 설교문
  3. 2009.09.28 요일 2:1-2 설교문(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2009. 9. 29. 08:18 카테고리 없음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칼 바르트는 이런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어느 마을을 나치가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산 위로 올라가서 전쟁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산 위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치가 물러갔다는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해서 여전히 나치가 잡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과 옛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을 깨닫지 못하니 여전히 옛 계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고전으로 알려진 한 책을 예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정말 지루하구나, 뭐 이런 책이 유명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삶의 경험들과 지식이 많아 지면서 그 책을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얼마나 좋은지요. 깨달음이 넘쳐서 와, 하는 탄성을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똑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저에게 그 책은 단순히 옛날 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새로운 책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어떤 사람은 옛날 책처럼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책으로 새롭게 영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고 믿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말씀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 말씀을 읽었어도 깨닫지 못하는 듯이 이 땅에는 그런 사람들이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을 보내어 말씀을 깨닫게 하도록 통로로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자, 기름부은 자 메시아 그리스도가 되셨듯이,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를 내가 보낸다라고 말씀하시며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 것이라 여기고 아무 의미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함을 위하여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 예배 때도 어떤 사람은 그냥 예배로 옛 것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비춤 받게 되면 기대하게 됩니다. 옛 것이 지나가고 새롭게 됩니다.
가정에도 이건 단순히 지루한 가정 생활일 뿐이야, 더 이상 변화는 없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고 옛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그 분을 기대할 때 이것이 바로 새것이 됩니다.

이 땅 가운데는 눈 어두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날마다 내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길 원하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나아가는 것,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사도행전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43: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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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28. 14:12 카테고리 없음

죄로 인해 괴로울 때

요한 일서 1:8-10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안 믿는 사람들이 기독인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네들은 도대체 뭘 그렇게 잘 못해서 마음을 찢으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나라는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감독도 이상한 눈으로 기독교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전도연이 교회에 가 있는데, 보혈을 지나라는 찬양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 찬양을 부르면서 깊게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생각하는데 그것을 감독은 어색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영화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마치 뭐가 그렇게 죄라고 생각해서 질질 짜는가 비꼬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나 정도면 잘 사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우리는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인들은 세상 사람들 보다 착하게 사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에서도 잘못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고, 십자가만 생각하면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잘 못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유형의 죄에 대한 모습들이 나옵니다.

첫번째는 1 10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죄인이고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지존파라는 폭력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는 그랜저가 가장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요새는 안 그렇죠? 소나타가 서민들 타는 차, 그랜저가 중산층이 타는차로 바꼈는데, 아마 여러분과 저는 빈층에 해당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존파는 부자들을 혐오해서 사업가를 납치해서 잔인하게 살해 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폭력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체포되고 나서도 더 많은 부자들을 죽이지 못했다고 발설하는 등 자신의 죄에 대한 뉘우침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어느 교회의 50이 넘은 집사님들로 구성된 전도팀의 끈질긴 사랑과 수 십 통의 편지, 그리고 전도지 등에 의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회개한 지존파들이 전도 특공대원들에게 보낸 답장의 일부이다.

"아저씨, 이 죄 많은 놈 때문에 고인이 되신 소윤오씨 자녀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음으로써 사죄하고 싶습니다."(OO)

"법정에서의 거만스런 제 행동을 지켜보셨을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절대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일 줄 몰랐습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 자기 한 몸 살아가기도 바쁜데 제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마의 대리인"(OO드림)

그리고 지존파의 두목격인 김OO 11살 때, 교회에 다니다가 중단했다고 하면서, 만약 계속 신앙 생활을 했더라면 자신의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편지를 통해 밝히고 있었다.

 ,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를 제시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잘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합니다. 빛을 비출 때 바로 우리는 우리에게 묻은 얼룩들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비춤을 받을 때 우리는 바로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았고 죄 속에서 살았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적인 설교로 유명하신 김남준 목사님은 회심과 거듭남에 대해서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을 그의 돌이킴이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는데, 거듭남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거듭났기 때문에 잘못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거듭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임을 받았기 때문에 잘못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빛에 비춤을 받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되고 죄 때문에 안타까워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 28절부터 32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런 죄악을 행하면서도 죄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일은 당연하다고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진리 가운데 비추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2주 동안 저의 모습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의 정한 말씀이 다 저에게는 콕콕 다가와 저를 찔렀습니다. 또한 사경회 때 사경회 강사님이 이 구절을 읽어주셨는데 저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삶에 있어서 지쳤다고,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게 사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것인가? 그리고 냉소적인 것을 쏟아 놓던 저에게 불공정한 대접을 받는다고 그냥 내 삶 내버려 두라고 그러고 지내는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여지 없이 그냥 들려졌습니다. 제가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때 들려지는 말씀은 저에겐 큰 은혜였습니다. 그 모든 죄악이 지적되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보혈을 흘려 주심은 다시금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혹시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우십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그것이 은혜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영원한 심판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이 올바른 사람인 것처럼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빛에 비추임을 받은 사람, 하나님 말씀에 비추임을 받은 사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무릎꿇어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울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며 반신 반의 했던 사람, 같이 비난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불신을 깨닫고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압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 압니다. 최소한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거듭나야 할 사람들이며,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너의 삶 가운데 문제라고 지적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청소년 사역을 하는 한 동기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점점 듣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단지 성적을 중요시하는 메시지들이 많이 들려집니다. 과연 어디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듣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해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중에 처형 받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때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일은 해서는 안된다고 따끔하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사랑 가운데 권면과 훈계 해 주는 부모님이 있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보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아프더라도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불쌍한 사람은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잘못된 관념은 1 8절처럼 자기는 이제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나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에 막 살아도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육신은 멸하여지고 영혼은 구원받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의 문제는 의미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단언합니다. 죄가 없다, 나는 죄와 상관없다라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뿐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함받고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를 범하는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말하면서 이 땅에서 믿어도 죄를 범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 가운데 완전함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 1절은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거듭나면 그만이다. 이제는 죄와 전혀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구원파는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 우리 인간의 한계,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용서 받았으니 이제 끝났다라고 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깨달아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데, 그런 반성을 하지 못함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조차 못 느끼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구원받았다 더 이상 삶은 중요하지 않다.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생각하시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생각하시며 겸손으로 이 땅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막 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항상 우리 가운데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고, 그 모습들을 뉘우치고 돌이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한 스님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부좌를 틀며 하나님 아버지 관세음 보살이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가운데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닮은 사람으로 자라가고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며 나아갈 필요는 바로 현재 우리가 범하는 죄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내 삶 가운데 부족한 점들 때문에 가슴 아프다면 여러분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고 빛이 비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랑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분이 나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게 뭐 중요합니까? 말씀을 못 지킬 수도 있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작은 말씀에도 가슴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이며 진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전혀 내 마음 속에 어떤 울림도 없고 찔림도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내 안에 비추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더러워진 옷을 입고 어둠 속에서는 더러움이 보이지는 않지만, 빛 가운데 나가면 우리 모습 가운데 더러움을 이내 볼 수 있고 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죄 가운데 괴로울 때 그것을 그냥 방치하시지 마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분의 용서를 구하는 삶이 얼마나 귀한 삶이겠습니까?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시간 내가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지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성령 안에서 발견하시는 분은 하나님 제가 돌이키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성령 하나님의 고치심 새롭게 하심을 원합니다. 저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구원받음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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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28. 14:04 카테고리 없음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살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하는 고3 고등학생 딸을 둔 부모에게 부모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먹고 싶으면 많이 먹어, 대학가면 다 빠져. 그걸 철썩같이 믿은 딸은 너무나 많이 먹었습니다. 대학갔더니 살이 전혀 빠지질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라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살 안찌는 집안이다. 많이 먹어라. 밥 잘 먹는게 최고다. 그 말을 철썩같이 믿은 저는 우리 집안은 살 안찌는 집안, 아버지를 봐도 말랐고 동생을 봐도 말랐으니,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겠구나 생각하고 열심히 먹었습니다. 특히 방학 때는 나 같은 체질은 살이 안 쪄. 이러고 하루에 캔 커피를 10캔 씩 열심히 먹은 것 같습니다. 안 좋을 것을 알면서도 달달한 것이 맛이 좋으니 살 안찌는 체질인데 살이 찌겠나 싶어서 열심히 먹었습니다. 왠걸요. 속았습니다. 이제는 뱃살이 너무 급격하게 쪄서 밥 먹는게 힘들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살 많이 쪄서 괜찮은 거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죄 지어도 괜찮다. 얼굴에 철판 깔아야 한다. 뻔뻔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교회에 나오면 뭐 해라, 이런 것도못하냐 이런 메시지가 주로 들려졌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보면 교회에 나가면 왜 이리 목사님들이 잔소리를 하시는지 정말 싫었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이 뭐라 그러지,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뭐라 그러지, 좀 쉴라 그랬더니 교회에 나가서도 잔소리 들으면 얼마나 스트레스 받습니까? 툭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벌 주신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무서운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만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많이 놓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죄 져도 괜찮다. 하나님은 언제든 용서하시니까, 철판을 깔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뭐 나쁘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죄책감이 오히려 뻔뻔함 보다 좋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러나, 뻔뻔함을 갖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줍니다. 죄책감에 너무 사로잡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떠나는 것은 문제겠지만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않는 죄책감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자신에게서는 어떤 공로도 찾을 수 없다 생각하며 하나님을 겸손하게 구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누군가가 죄 짓는 것이 괜찮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전도폭발 훈련의 복음 제시 부분에는 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죄의 정의 - 흔히 죄라고 하면 우리는 강도나 살인, 도적질, 간음 등을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화를 내는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입니다. 또한 죄는 행동으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교만, 정욕, 미움, 탐심, 시기, 질투, 거짓말 등,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말로도 죄를 짓게 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죄의 원어의 뜻은 우리의 마음의 방향성이 과녁을 벗어난 것, 즉 하나님을 향해 가지 않는 것을 일컫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 뜻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으며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행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 짓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괜찮다 괜찮다 하니 습관적으로 아 이런 것은 괜찮구나 빠져 버리면 언젠가 죄에 대한 살이 쪄서 숨을 헐떡이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죄를 방치해 두면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종류에 따라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이지 죄는 그 최종적인 목적이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된 행위는 그 심각하고 덜 심각하고를 떠나서 사람을 파멸시키는 쪽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성이 크다고 해서 또한 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을 낙심시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은 당신이 죄 때문에 사단에게 이끌려 결국 사망으로 귀결되는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 죄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희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부터 용서받고 자유로워지며 소망을 갖게 된다. 절망속에서 새롭게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주님의 메시지에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회개의 메시지 뒤에는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가 반드시 수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픔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하늘 소망을 가지고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 나가는 데 노력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 보고 너 지금 꼴 보니 뭐 될래? 너 참 인생이 걱정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하고, 너 지금 모습은 비록 잘 하고 있지 않지만 이런 점만 고친다면 넌 참 훌륭한 사람이 될꺼야라고 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더라도 그 죄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큰 뜻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질겁니다라고 용기를 북돋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의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다 죄 짓지 않기를 원하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뒤에 2 1절 하반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변호해 주시는 분이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합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뜻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도 해 보고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 합니다. 또다시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을 합니다. 그럴 때 사단은 우리를 노릴 때가 많습니다. 아예 무너져서 희망없게 만들고 그리스도를 떠나게 만들려고 별 수단을 다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넘겨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 때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는데, 이런 죄로 무너짐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생명까지도 주셨는데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신다고 우리를 변호하신다고 요한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힘내라고, 무너지더라도 다시금 죄를 이겨내서 너희가 죄 가운데 떠나도록 빛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만 생각합니다. 단지 과거의 사건이고 과거에만 사랑을 보이셨던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와는 먼 옛날 이야기인것처럼 지금은 우리 가운데 그분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변호하시며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변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죄 가운데 무너진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하는 자녀가 죄 가운데 무너진 거 다 저의 피로 대속했습니다. 하나님 이 자녀 가운데 죄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인도하십시요. 라고 기도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다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고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정말로 심각하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습게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우스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우습게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그만큼 죄가 예수님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죄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죄에 대한 처절한 인식 없이는 어떤 그리스도의 복음도 우리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래도 무너짐이 왔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무너지더라도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아가는 것을 하나님 뜻 따라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예수님이 우리가 죄를 이기도록 격려하고 중보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다시금 힘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서강대를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낙망함이 많이 있었습니다. 서강대 학생들의, 너무나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열심히 사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의 대학생활을 후회했었습니다. 공부도 안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모습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다가, 벤치에 앉아 지난 날들을 생각해 보며 낙망 가운데 앉아 있는데,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열심히 살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은 부르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하신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아니면 때로는 삶의 문제로 인해서 힘들어 주저 앉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지난 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 많이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 앉지 않게, 예수님은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를 격려하시고 새롭게 용기를 가지고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광고 cf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와 딸들이 사진을 찍는데, 사람들은 아버지가 같이 사진을 찍기 싫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사진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어머니와 딸들의 사진을 담아주기 위해서 평생 사진을 찍느라 그 사진 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시며 우리를 변호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행복을 누리느라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때 그 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복해 하실지도 모르는 그런 모습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쁠 때 우리 인생 가운데 풍성할 때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잊어버리고 우리만이 즐거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그 땀방울을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또는 우리는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 그 죄가 자신을 망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토록 중보하시는 것도 모른채 우리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시려는 그 주님의 노력을 모른채 말입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묵묵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골고다의 길에서 피와 땀을 흘리신 그 이유, 누구 때문입니까? 누구 때문에입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희생과 섬김이 자꾸 잊혀져 가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죄의 노예, 사망의 권세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기뻐하시고 우리가 죄로 허덕이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포기하려고 했으면 십자가도 지지 않으셨겠지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란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기꺼이 그 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 주심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그 분에게 조금이라도 우리의 사랑을 드리고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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