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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28. 14:04 카테고리 없음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살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하는 고3 고등학생 딸을 둔 부모에게 부모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먹고 싶으면 많이 먹어, 대학가면 다 빠져. 그걸 철썩같이 믿은 딸은 너무나 많이 먹었습니다. 대학갔더니 살이 전혀 빠지질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라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살 안찌는 집안이다. 많이 먹어라. 밥 잘 먹는게 최고다. 그 말을 철썩같이 믿은 저는 우리 집안은 살 안찌는 집안, 아버지를 봐도 말랐고 동생을 봐도 말랐으니,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겠구나 생각하고 열심히 먹었습니다. 특히 방학 때는 나 같은 체질은 살이 안 쪄. 이러고 하루에 캔 커피를 10캔 씩 열심히 먹은 것 같습니다. 안 좋을 것을 알면서도 달달한 것이 맛이 좋으니 살 안찌는 체질인데 살이 찌겠나 싶어서 열심히 먹었습니다. 왠걸요. 속았습니다. 이제는 뱃살이 너무 급격하게 쪄서 밥 먹는게 힘들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살 많이 쪄서 괜찮은 거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죄 지어도 괜찮다. 얼굴에 철판 깔아야 한다. 뻔뻔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교회에 나오면 뭐 해라, 이런 것도못하냐 이런 메시지가 주로 들려졌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보면 교회에 나가면 왜 이리 목사님들이 잔소리를 하시는지 정말 싫었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이 뭐라 그러지,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뭐라 그러지, 좀 쉴라 그랬더니 교회에 나가서도 잔소리 들으면 얼마나 스트레스 받습니까? 툭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벌 주신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무서운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만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많이 놓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죄 져도 괜찮다. 하나님은 언제든 용서하시니까, 철판을 깔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뭐 나쁘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죄책감이 오히려 뻔뻔함 보다 좋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러나, 뻔뻔함을 갖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줍니다. 죄책감에 너무 사로잡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떠나는 것은 문제겠지만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않는 죄책감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자신에게서는 어떤 공로도 찾을 수 없다 생각하며 하나님을 겸손하게 구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누군가가 죄 짓는 것이 괜찮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전도폭발 훈련의 복음 제시 부분에는 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죄의 정의 - 흔히 죄라고 하면 우리는 강도나 살인, 도적질, 간음 등을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화를 내는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입니다. 또한 죄는 행동으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교만, 정욕, 미움, 탐심, 시기, 질투, 거짓말 등,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말로도 죄를 짓게 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죄의 원어의 뜻은 우리의 마음의 방향성이 과녁을 벗어난 것, 즉 하나님을 향해 가지 않는 것을 일컫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 뜻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으며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행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 짓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괜찮다 괜찮다 하니 습관적으로 아 이런 것은 괜찮구나 빠져 버리면 언젠가 죄에 대한 살이 쪄서 숨을 헐떡이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죄를 방치해 두면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종류에 따라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이지 죄는 그 최종적인 목적이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된 행위는 그 심각하고 덜 심각하고를 떠나서 사람을 파멸시키는 쪽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성이 크다고 해서 또한 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을 낙심시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은 당신이 죄 때문에 사단에게 이끌려 결국 사망으로 귀결되는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 죄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희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부터 용서받고 자유로워지며 소망을 갖게 된다. 절망속에서 새롭게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주님의 메시지에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회개의 메시지 뒤에는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가 반드시 수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픔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하늘 소망을 가지고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 나가는 데 노력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 보고 너 지금 꼴 보니 뭐 될래? 너 참 인생이 걱정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하고, 너 지금 모습은 비록 잘 하고 있지 않지만 이런 점만 고친다면 넌 참 훌륭한 사람이 될꺼야라고 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더라도 그 죄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큰 뜻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질겁니다라고 용기를 북돋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의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다 죄 짓지 않기를 원하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뒤에 2 1절 하반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변호해 주시는 분이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합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뜻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도 해 보고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 합니다. 또다시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을 합니다. 그럴 때 사단은 우리를 노릴 때가 많습니다. 아예 무너져서 희망없게 만들고 그리스도를 떠나게 만들려고 별 수단을 다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넘겨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 때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는데, 이런 죄로 무너짐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생명까지도 주셨는데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신다고 우리를 변호하신다고 요한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힘내라고, 무너지더라도 다시금 죄를 이겨내서 너희가 죄 가운데 떠나도록 빛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만 생각합니다. 단지 과거의 사건이고 과거에만 사랑을 보이셨던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와는 먼 옛날 이야기인것처럼 지금은 우리 가운데 그분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변호하시며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변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죄 가운데 무너진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하는 자녀가 죄 가운데 무너진 거 다 저의 피로 대속했습니다. 하나님 이 자녀 가운데 죄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인도하십시요. 라고 기도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다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고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정말로 심각하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습게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우스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우습게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그만큼 죄가 예수님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죄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죄에 대한 처절한 인식 없이는 어떤 그리스도의 복음도 우리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래도 무너짐이 왔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무너지더라도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아가는 것을 하나님 뜻 따라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예수님이 우리가 죄를 이기도록 격려하고 중보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다시금 힘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서강대를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낙망함이 많이 있었습니다. 서강대 학생들의, 너무나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열심히 사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의 대학생활을 후회했었습니다. 공부도 안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모습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다가, 벤치에 앉아 지난 날들을 생각해 보며 낙망 가운데 앉아 있는데,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열심히 살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은 부르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하신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아니면 때로는 삶의 문제로 인해서 힘들어 주저 앉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지난 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 많이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 앉지 않게, 예수님은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를 격려하시고 새롭게 용기를 가지고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광고 cf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와 딸들이 사진을 찍는데, 사람들은 아버지가 같이 사진을 찍기 싫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사진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어머니와 딸들의 사진을 담아주기 위해서 평생 사진을 찍느라 그 사진 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시며 우리를 변호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행복을 누리느라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때 그 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복해 하실지도 모르는 그런 모습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쁠 때 우리 인생 가운데 풍성할 때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잊어버리고 우리만이 즐거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그 땀방울을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또는 우리는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 그 죄가 자신을 망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토록 중보하시는 것도 모른채 우리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시려는 그 주님의 노력을 모른채 말입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묵묵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골고다의 길에서 피와 땀을 흘리신 그 이유, 누구 때문입니까? 누구 때문에입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희생과 섬김이 자꾸 잊혀져 가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죄의 노예, 사망의 권세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기뻐하시고 우리가 죄로 허덕이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포기하려고 했으면 십자가도 지지 않으셨겠지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란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기꺼이 그 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 주심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그 분에게 조금이라도 우리의 사랑을 드리고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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